지난 소식지에서 작곡가 강은수와의 '무식해서 용감한' 인터뷰를 예고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5월 22일 금요일 오후에 작곡가 강은수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작곡가의 이야기를 들었고, 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애초에 성공하기 어려운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어가 생초보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말들이 오고갔지만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공개하기에는 부적절한 대화가 장시간 이어졌습니다. 물론 저 개인적으로는 작곡가 강은수, 인간 강은수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어로서 화려하게 데뷔해 보려던 저의 의욕은 아무튼 꺽였고,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그저 작곡가 강은수와 현대음악에 대해서 써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아무쪼록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음마/공진성)




서양고전음악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조예로 유명한 소설가 송영은 2006년에 출간한 음악에세이 <바흐를 좋아하세요?>(바움, 2006)에서 이례적으로 젊은 작곡가 강은수를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이라면 우리 현대 작곡가 가운데 백병동이나 강석희의 이름쯤은 대개 안다. 그러나 그들의 음악이 어떤 것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거나 거의 없는 형편이다. 그들보다 한 세대 아래로 내려오면 비록 작품 활동이 왕성한 사람이라도 이름조차 모른다. 우리 현대 음악은 미아인가? 대뜸 이런 질문이 나온다. 탱글우드 음악축제에서 낼리 그루버의 건조하고 메마른 신작이 요요마에 의해 열연되는 동안 청중들은 꼼짝 하지 않고 진지하게 그 음악을 감상하던 모습이 부러움과 함께 다시 연상된다. 현대음악은 누구의 것이든 확실히 낯설다. 여기에는 모차르트의 잘 짜인 유쾌함, 슈만의 부드러운 비애 같은 것이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현대인들은 즐기기 위해 예술작품 옆으로 접근한다. 음악은 특히 심한 편이다. 자, 이러니 사람을 낯설게 하고 당황시키려고 작심하고 만든 것 같은 현대음악에 대중들이 선뜻 다가서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75-176쪽)

저는 낼리 그루버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사실 백병동과 강석희가 누구인지도 얼마 전에야 비로소 알았습니다. 작곡가 강은수와의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그가 위의 두 사람에게서 사사했음을 알게 된 것이죠. 그런데 작곡가 강은수는 또 어떻게 아냐고요? 그 사람이 작곡한 노래를 제가 지금 부르고 있거든요.^^

사실 제가 아는 현대 작곡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영훈, 서태지, 김현철, 빅뱅의 지드래곤, JYP 등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몇몇 작곡가들의 이름이 추가되었습니다. 이건용, 강은수, 신동일, 노선락, 류형선, 류건주 등등. 종류가 다르다고요? 뭐가 다르다는 거죠?

아~ 예. 이영훈, 서태지, 지드래곤, 박진영은 '대중음악' 작곡가라고요. 그럼, 그건 현대 음악이 아닌가요? 현 시대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현대 음악 작곡가'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과거 음악 작곡가'는 아니잖아요. ^^

'현대음악'은 다른 거라고요? 아마도 복잡하고 까다롭고 관습을 거스르는 '기법상 '현대적인 음악'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제가 좋아하는 이영훈이나 김현철이 기법상 '현대적'인 작곡가가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습니다만, 그래서 '현대의' 작곡가가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아는 현대 작곡가들, 예컨대 이건용, 신동일, 노선락, 류형선, 류건주의 곡이 기법상 그렇게 까다롭고 낯설기만 한 것은 아닌 것 같은데요그런 의미에서 이 두 부류의 작곡가들이 저에게는 다만 합창곡을 작곡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정도의 차이만을 가질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서태지의 곡 중에도 매우 까다롭고 낯선, 관습을 거스르는 실험적인 곡들이 있고, 마찬가지로 이건용, 강은수, 신동일, 노선락, 류형선, 류건주 등의 곡 중에도, 물론 아쉽게도 대중 매체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서태지의 곡들만큼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대중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곡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의 작곡가들 간의 차이라면 오히려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현대음악'이라는 단어를 기법상 난해한 음악을 일컫는 데에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송영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현대음악은 왜 까다롭고 낯설기만 한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일단 유보해 두는 게 좋겠다. 이건 나의 몫이 아니다. 진정한 해답을 얻으려거든 탱글우드의 청중들처럼 현대 작곡가의 여러 작품에 접근해서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것은 같은 시대를 사는 청중들의 도리이기도 하다. 우리 주변에는 다행히도 작곡가와 청중의 간극을 좁히고 청중 곁으로 다가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강은수가 바로 그런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176쪽)   

송영은 '현대음악이 왜 까다롭고 낯설기만 할까'라는 질문을 던지고서 대답을 회피합니다. 그러나 저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까다롭고 낯선 것을 추구하는 음악, 사람을 낯설게 하고 당황시키려고 작심한 듯한 음악을 '현대음악'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그렇다고요. ^^ 말장난 같나요? 아닙니다. 기법상 현대적인 음악이 추구하는 바가 필연적으로 유발하는 효과가 그것이니까요. 그 어떤 새로움과 혁신을 추구하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음악을 왜 만드냐고요?  그것이 그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것이니까요.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까지야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까다롭고 낯선' 음악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같은 시대를 사는 청중들의 도리"라고 주장하는군요. 글쎄요? 저는 '효도'마저 캠페인의 대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도리'를 얘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도리'는 '효용', 특히 경제적 효용과 결합할 때에만 지켜지지 않던가요? 그런 의미에서 청중들이 기법상 현대적인 음악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청중들이 '도리'를 다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저 그런 음악이 까다롭고 낯설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런 곡들이 목표하는 바는 애초부터 대중적 인정이 아니라 전문가들 사이에서의 인정 아니었던가요?

송영은 작곡가 강은수를 "작곡가와 청중의 간극을 좁히고 청중 곁으로 다가서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고민하는 작곡가"라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그 평가는 적절해 보입니다. 제가 만난 작곡가 강은수 역시 여러 차례 그 점을 강조했으니까요. 그러나 갈등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청중들과 기획자들이 동시대의 작곡가들에게 그 어떤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직접 청중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강은수는 자기 나름의 개성이 있고 신선하고 발랄한 악상을 주저 없이 펼쳐가는 젊은 작곡가이다. 그는 현대 작곡가로서는 드물게 '대중 옆으로'라는 기법상의 명제를 떠안고 있다. 이제 시작인만큼 그가 낯선 현대음악을 어떻게 대중 옆으로 끌어다 놓을지, 변덕 많고 참을성 없는 현대의 청중들을 어떤 음악으로 사로잡을지 그 과정을 기대와 함께 지켜보고 싶다. 그는 몇 개의 작품들로 그런 기대감을 갖기게 충분한 담보를 보여줬다고 생각된다. (181쪽)

과거에 작곡가 강은수는 이른바 '현대적인' 음악기법들을 그 극단까지 추구했다고 합니다. 대중들에게 한없이 까다롭기만 한 음악, 따라서 대중들이 낯설어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현대적인' 음악을 추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법상의 탁월함을 인정받아서 작곡가 강은수는 여러 차례 작곡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즉 그들만의 리그에서 이미 음악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죠. 그러나 이제 작곡가 강은수는 '대중 옆으로'라는 새로운 명제를 붙들고서 작업에 임하고 있습니다. 대중과 음악적으로 소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동시대의 청중들에게 청중의 '도리'를, 동시대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다리기보다, 자신의 '도리'를 먼저 이행하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작곡가 강은수의 이 작업에서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음악마을은 아마추어 합창단의 구성상의 특징 때문에 그 자체로 대중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작곡가는 최소한 음악마을 단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음악마을과 음악적으로 소통하지 못한다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음악마을이 강은수 합창곡의 대중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인 것입니다.  

작가는 오랜 교회 경력으로 예배용 노래를 몇 편 써낸 걸로 알려졌으나 가곡 쪽에는 달리 선보인 작품이 없다. 현대의 다양한 시들을 소재 삼은 새 가곡의 시도를 이 작가에게 권유하고 싶다. (180쪽)

이 권유의 결과였을까요, 아니면 고교 동창회 사이트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음악마을의 상임지휘자 홍준철이 곡을 위촉한 결과였을까요? 2006년 이후로 강은수는 "현대의 다양한 시들을 소재로 삼은" 가곡들을 연속해서 작곡하였고,
음악마을은 그 곡들의 초연을 번번히 맡았습니다. 그리고 오는 2009년 7월 5일, 음악마을은 강은수의 곡만으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를 온전히 채울 예정입니다.


'현대음악'은 '현대의 음악'이라는 뜻과 함께 '기법상 현대적인 음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때 작곡가 강은수는 그런 의미에서 기법상 현대적인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작품발표회에서 발표되는 '낯설고 까다로운' 곡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합창단 음악이있는마을과의 우연한 결합은 작곡가 강은수에게 현대적인 음악의 작곡가로서만 머물지 말고, 또한 동시대의 대중들과 함께 호흡하는 작곡가가 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요구에 응하여 강은수는 이제 하나의 양식으로서의 '현대'음악의 작곡가일뿐만 아니라, 동시대인들과 음악으로써 소통하는, 진정한 '현대의' 작곡가로 또한 변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강은수는 서태지, 지드래곤, JYP와 같은 종류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다만 춤을 추지 못하는(?),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합창곡을 만드는 작곡가. ^^

여러분이 아는 현대 작곡가 목록에도 '강은수'라는 이름을 추가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Posted by 공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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